칠갑산 겨울 산행과 동동주 한 사발.
답사기 작성일 : 2014년 8월
이파리가 하나 둘 떨어지더니 결국 나무들은 헐벗었다.
그리고 하얀 겨울을 맞는다.
따뜻한 집 안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환호를 보내던 때가 언제였을까.
페인트 칠해진 장식품이 아닌 진짜 눈과 깨끗한 공기가 가득한 아름다운 겨울로 들어간다.
높이는 561m로 그다지 높지 않지만, 훼손되지 않은 산 그 자체의 멋이 살아 있어 칠갑산은 산 다운 산으로 꾸준히 그 나름의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게다가 겨울에는 칠갑산 알프스 마을에서 얼음분수축제를 열어 더욱 관광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어느 코스로 올라도 2~3시간의 산뜻한 산행으로 겨울산의 진가를 맛볼 수 있는데, 우리는 천장호에서 출발한다. 탁 트인 넓은 호수를 보며 시원한 마음으로 산행을 시작하고 싶다.
얼어붙은 천장호는 새삼스럽게도 지금 여기가 꽤 춥다는 것을 알려준다. 얼음 사이로 의연하게 솟아 있는 나무가 멋지다. 출렁다리를 건너 나무데크를 밟고 산속으로 들어간다. 완만한 경사를 살살 올라간다기 보다 위로 위로 차곡차곡 만들어진 계단은 처음부터 상당히 힘들게 한다. 괴로운 등산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나중에 알았지만 초입인 지금이 가장 힘들고 이 나무계단의 구간만 넘기면 그리 힘들지 않다.
천장호에서 정상까지는 대략 3km정도. 1km정도를 오르는 동안은 그다지 눈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나무들 아래에는 자신에게서 떨어진 나뭇잎들이 흙과 함께 전신의 양분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나뭇잎 길을 걷는다. 한 발 한 발 내딛을수록 차가운 공기에 얼었던 몸은 뜨겁게 열을 발산한다. 숨이 차오르고 땀이 흘러내린다. 한겨울에 이렇게 천천히 걷는데도 땀이 쏟아지다니, 겨울산이 아니라면 어떻게 겪어볼 수 있을까.
중간쯤 올랐을까. 제대로 된 눈길이 시작된다. 마침 내리는 눈발이 지난 발자국들을 덮는다. 깨끗하고 하얀 길을 우리에게 새로 만들어 주는 것 같아 고맙다. 하얀 눈을 흙발로 더럽히게 되어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감사히 정상을 향한다. 오를수록 힘들기 보다는 편안한 걸음을 내딛게 되고 풍경은 점점 아름답게 펼쳐진다. 지금 내가 겨울산에 파묻혀 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진다.
파리한 나무들을 눈은 새하얗게 덮어준다. 그 사이로 붉은 노을이 퍼져들지만 눈은 녹지 않고 나무와 함께 한다. 눈이 누군가의 방해 없이 가장 편안하고 아름답게 머무를 수 있는 곳은 역시 산이 아닐까. 바다는 쌓이기 힘들고 도시는 쌓이는 족족 치워버린다. 산은 괜찮다. 그래서 우리들은 겨울에 산을 찾게 된다.
해질녘 추운 겨울 하늘에 번지는 진홍빛은 산속의 우리에게 따뜻한 온기를 주지는 않지만 그보다 특별한 감동을 스미게 한다.
정상에 올라 산 넘어 산 넘어 산들을 바라본다. 겨울산의 풍경은 수묵화 같다. 흰색과 검은색을 촘촘한 붓질들로 완성한 아름다운 풍경화 같다. 조금은 춥고 위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산을 오른 자들에게만 보여주는 값진 풍경이다. 올라 본 사람들은 안다. 사진으로 자연이 만든 아름다움을 담기에는 역부족이다. 561m의 산에서 이런 아름다운 겨울을 느낄 수 있다니 참으로 고맙지 아니한가.
산행의 마침표는 뭐니 뭐니 해도 동동주 한 사발이 아닐까 싶다. 조마조마 조심조심 찬바람을 헤치며 하산하였으니, 뜨끈한 아랫목에서 긴장을 풀고 시원한 동동주에 손두부를 한 점 크게 먹고 싶다.
콩밭 매는 아낙네가 유명한 칠갑산답게 이곳은 콩을 주재료로 한 음식들이 대표 음식이다.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서둘러 주문을 한다. 산행 후에는 배가 무척 고프다.
밑반찬이 먼저 깔린다. 각종 나물에, 김치, 도토리묵, 장조림, 깻잎 조림 등 메인 메뉴가 나오기도 전부터 군침이 흐른다. 정갈한 반찬들을 뒤이어 검정손두부와 구기자주가 나온다.
검정손두부는 일반 흰두부와 달리 검은콩으로 만들어 그 진한 맛과 영양이 남다르다. 구기자주 또한 이곳 청양의 특산물인 구기자를 이용해 만들어 맛도 좋고 몸에도 좋은 술이다.
얼어붙은 뱃속을 녹여줄 청국장이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걸쭉한 청국장에는 각종 버섯이 넉넉히 들어있어 밥에 얹어 비비면 그 탱글탱글하고 구수한 식감에 게 눈 감추듯 식사를 하게 한다.
첫술과 첫 잔을 든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그릇들이 동이 났다.
차갑게 얼었던 몸은 이미 녹다 못해 흐물흐물 편안하고 노곤해졌다. 아름다운 자연과 맛있는 식사는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기분마저 느끼게 한다. 칠갑산의 멋과 맛을 온몸으로 느끼며 가득 찬 몸과 마음으로 귀가한다.